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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KOJA

2026-05-15 · Blackboard

인증서가 된 표준

2026년 5월, 기업의 기후 목표를 인증하는 국제 기구 SBTi(Science Based Targets initiative)가 주요 규정안을 철회했다. 가스 연료 데이터센터가 다른 지역의 재생에너지 투자를 자사 화석연료 소비의 상쇄 근거로 활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규정 철회 배경에는 메타, 아마존 등 대형 기술기업과 로비 단체들의 직접적인 압력이 있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내부 사정에 정통한 4인을 인용해 보도했다. 규제의 적용 대상이 될 기업들이 규제 자체를 원천 차단한 셈이다.

회계상의 이동, 실물의 불변

논점이 된 회계 구조는 REC(재생에너지 인증서)다. 기업이 다른 지역에서 재생에너지를 조달하면, 실제 운용 시설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원과 무관하게 친환경 실적으로 계상할 수 있다. 철회된 규정은 바로 이 관행을 가스 의존 데이터센터에 제한하려 했다.

결론은 명료하다. 회계장부 위의 탄소 귀속이 이동할 뿐, 서버를 구동하는 연료는 바뀌지 않는다.

이 구조 자체는 새롭지 않다. 자발적 공시 체계에서는 언제나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무엇을 공시할지는 공시 주체가 결정하고, 공시의 의미는 공시 주체와 기준 수립 기구 사이의 협상으로 형성된다. 두 당사자의 이해가 수렴할수록, 공시는 공시 주체가 선호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SBTi 사례는 이 패턴이 가시화된 사건이다.

독립성이라는 하중 지지 구조

자발적 표준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단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기준을 만드는 기구가 피감독 산업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메커니즘의 문제다.

독립적인 기구가 만든 기준은 제약으로 작동한다. 기업은 기준을 충족하거나 충족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반면 압력에 굴복 가능한 기구가 만든 기준은 인증서처럼 기능한다. 과정에 참여하기만 하면 취득 가능한, 실질적 행동 변화를 담보하지 않는 자격증이 된다.

SBTi 사례는 이 구분을 구체화한다. 최대 에너지 소비자들이 압력을 행사했고, 규정은 철회됐다. 선호하는 회계 방식은 그대로 유지됐다. 표준 자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바뀐 것은 그 표준의 제약 능력이다.

반복되는 포획 패턴

이 구조는 과거에도 반복됐다. 업종이 달랐을 뿐, 패턴은 동일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신용평가사들은 자신들이 평가하는 증권 발행자로부터 수수료를 받았다. 평가 등급은 형식상 정밀했지만, 기관은 발행사의 선호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등급과 실제 리스크 사이의 괴리는 위기가 터지고 나서야 가시화됐다.

회계법인도 구조적으로 동일한 긴장 위에 있다. 피감사 기업이 감사인을 선임하고 보수를 지급한다. 독립성 규정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긴장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규정 없이는 감사가 피감사 기업에 대한 서비스로 전락한다.

자발적 기후 표준이 규제 감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다. 외부 집행 메커니즘이 없다. SBTi는 규정을 철회할 수 있다. 정부 집행 권한이 뒷받침되는 의무적 규제 체계에서는, 피규제 기업이 로비만으로 규정을 무력화하기 어렵다. 준수 비용이 자발적 선택이 아닌 규제 제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동의와 메커니즘의 차이

SBTi의 규정 철회는 2026년 5월이라는 시점에 고정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드러낸 구조적 질문은 보편적이다.

자발적 표준 기구의 운영이 최대 피측정 당사자들의 동의에 의존할 때, 그 표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SBTi 사례가 시사하는 답은 단순하다. 표준이 조정된다. 하나의 극적 결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실질적 제약을 만드는 규정은 제안되고 반박되고 철회된다. 기업들이 수용할 수 있는 규정만 살아남는다. 표준은 산업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수렴한다. 산업의 수용이 기구의 정당성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는 SBTi라는 기관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피측정 당사자가 동시에 자금 제공자이자 협력자인 모든 자발적 기구가 직면하는 구조적 유인에 대한 설명이다. 의무적 집행 구조가 없는 자발적 체계는, 이 유인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자발성 이후

2026년 중반 현재, 열린 질문이 하나 남는다. 로비로 무력화 가능한 자발적 프레임워크가 결국 실질적 강제력을 갖춘 규제로 대체될 것인지의 문제다.

AI 인프라 확장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급증하는 지금, 무엇이 친환경이고 무엇이 아닌지는 단순한 공시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5년 초,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30년까지 약 두 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 규모에서는 탄소 귀속의 방식이 실물 에너지 그리드에 영향을 미치는 실질 변수가 된다.

온체인 시장은 다른 영역에서 하나의 구조적 대조점을 제공한다. 공개 블록체인 위의 거래는 자발적 기구의 인증이 필요 없다. 거래가 일어났는지, 가격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는 원장이 직접 증명한다. 누구도 수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후 회계가 직면한 거버넌스 문제의 핵심 — 검증이 신뢰에 의존하기에 포획된다는 것 — 이 온체인 아키텍처가 설계 단계에서 제거하려 했던 문제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SBTi의 궤적은 자발적 프레임워크가 인증서를 계속 발급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규제 집행이 제약을 부과할 때까지.

온체인 시장에는 로비할 수 있는 표준 기구가 없다 — Blackboard.